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 상륙작전 (문단 편집) === 동쪽 진격문제와 원산 상륙작전의 문제점 ===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서 원산 지역의 바다에 대규모의 소련제 기뢰밭이 깔린 것에 직면하여 기뢰제거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한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 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일본에서 저술된 [[6.25 전쟁]]에 따르면 유엔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을 이 원산 상륙으로 꼽는다. 여기서 언급한 바로는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비해서 경력과 학업성적 그리고 1920년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아주 고참이였다. 맥아더가 육참총장을 할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부관이였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2차대전 중에 맥아더는 필리핀 철수를 하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지 못한 반면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전선 총사령관으로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였고 이러한 사실에 맥아더는 약간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 된 맥아더는 실제 10군단을 미8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직할부대로서 2개의 군을 지휘하는 고집을 부렸다. 이에 따라 백두대간을 기점으로 전선을 나누어 10군단을 원산 상륙 후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원산 상륙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까지 미국 정부와 유엔군의 작전목적이 38선의 회복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북으로 진격도 안 되었고 차량이동이 기본인 10군단이 동쪽으로 진격해도 애매한 상황이였다. 이왕 병력은 빠져나와야 하고 도로는 엉망인데 북한군은 괴멸되지 않았을 거고 평양도 사수할 거니까 원산으로 상륙한 다음 평양을 치자는 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 태평양 사령부에 속하는 모든 배를 동원해서 원산상륙을 시도했지만 서울에서 병력을 다시 인천으로 빼서 다시 장비를 하역하고 병력을 탑승시킨 후 원산으로 가는 동안 이미 한국군 1사단이 먼저 원산을 점령하게 되고 이 병력들은 행정상륙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주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미 원산 앞 바다는 기뢰천지가 되어있었고 소해병력은 일본 소해정까지 다 끌고 와서도 한 달 이상을 소해 해야했고 모든 수송선은 여기서 열중쉬어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여서 유엔군 참모부는 반대했지만 맥아더가 원산상륙을 결정하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미 10군단 병력이 태백산맥은 정녕 넘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으로 진격했으면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의 성과가 더 나왔을 거라고 판단되었고, 원산상륙의 보급상의 문제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이 그렇게 빨리 후퇴할지를 생각하지 못한 결정적인 판단미스였다. 이때 참모진의 원산상륙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탄약보급선의 문제였는데 인천항과 김포공항, 경부철도로 보급선을 유지하게되는 유엔군 입장에서 부분 파손된 김포공항과 철도가 중간중간에 끊겨서 긴급복구를 했지만 아주 서행 운전해야 하며, 중간중간에 잔류한 북한군의 습격으로 보급선의 안정적 유지가 힘든 입장에서 인천항은 유엔군의 생명줄이였다. 하지만 이 원산 상륙에 의해서 탄약 재고량이 2일치로 간당간당하게 되고 원산 상륙 후에도 이 탄약재고량은 겨우 예비분 2일치를 유지하는 상황이 청천강 유역에 유엔군이 도착한 시점의 일이다. 이때 충분한 탄약 재고량이 있었다면 평양도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청천강 전투|청천강 패전]] 후에 임진강 유역까지 밀려나지 않았다. 평양 철수의 제일 큰 이유가 중공군을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보급량의 부족으로 미군의 강점인 화력을 쏟아 부울 수 없게 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대동강 방어선, 그러니깐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종심이 좁은 지역으로서 충분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방어가 가능했을것이지만, 여기서 이 보급선의 문제로 대동강 방어선을 방어하지도 않고 급하게 포기하게 된 것이다. 여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까지는 명장 소리를 들을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그 후의 북한군 잔존세력의 전력을 과대 파악 하는 바람에 한번 잘못 끼운 단추가 다른 단추까지 계속 잘못 끼우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사실 맥아더는 [[미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수석졸업, 최연소 장군, 최연소 사단장, 최연소 참모총장 등 군인으로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한국전쟁을 빨리 마무리해서 전쟁영웅으로 명예롭게 예편한 후 미국 국민의 열렬한 인기를 등에 업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1952년 11월 미국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장기집권에 신물나서 공화당후보로 누가 나오더라도 대통령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다. 이런 야망과 쇼맨쉽, 조급함 등이 현지 지휘관이나 참모들 심지어는 트루먼 대통령의 말도 무시하고 무능한 예스맨들[* 에드워드 알몬드, 찰스 윌러프비 등]과 합심하여 무리하게 진격하였다가 모든 걸 망쳤고 본인도 불명예 제대에 국민적 비난으로 백악관 입성의 꿈은 날라가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 원산상륙을 위해서 춘천으로 급하게 진격을 안하고 10군단을 회군시킨 것은 결정적인 실수다. * 원산상륙으로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 원산상륙이 없었다면 대동강선으로 휴전선이 그여졌을 확률도 있다. * 만약에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교통 때문에 더 이상 가지를 못했고 그 당시 경부가도 말고는 장비를 가지고 후퇴할 수 없었으며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패잔병 몇 명을 더 잡을 정도지 한반도를 횡으로 진격한 것은 전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히 북한군은 잔존 빨치산의 안내를 받아 태백산맥을 따라 장비를 버리고 총만 들고 북으로 올라갔고 그 당시 우리나라 형편상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그때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준상황이였고 오히려 그 피해상황을 적게 판단하였기 때문에 엉뚱한 원산 상륙작전이 계획되었고 삽질작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 인천 상륙작전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작전이였다. 하지만 너무 작전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 판단미스가 되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 * 중공군들은 10월 10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자마자 압록강과 두만강변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공군 개입 전이라는 것은 엉터리다. * 마오쩌둥의 참전선언으로 긴가 민가한 트루먼 대통령이 북진명령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일단 군사학자들의 의견 중 일부는 타당하다. 김일성이 서울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서울로 진격했으면 서울 시가전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산 상륙작전의 경우 효용성 자체도 문제가 있고, 꼭 하더라도 이미 상륙한 부대를 다시 인천항에 집결시켜서 다시 배에 탑승시킨 다음, 동해안까지 빙 돌아서 항해한 다음에 상륙하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별도의 부대를 빨리 보내는 편이 바람직했다. 그런데 이 의견에는 당시의 [[강원도]]와 [[백두대간]]의 험준함과 교통시설 미비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다. 지금도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시설이 미흡하며, 특히 대량의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철도]] 시설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서울에서 정동쪽 방향으로 진격할 경우, [[경기도]] 경계를 넘어서부터는 도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지독한 산악지대를 횡단해야 동해안에 이르게 된다. 서울 탈환 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수원 방면을 맡은 부대의 일부가 서울 남쪽에서 [[한강]]을 도하해서 남산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지원한 사실이 있을 정도였는데, 소수의 기동부대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횡단한다고 하면 북한군의 저항이 없다고 해도 속도도 느리며,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간신히 길만 막은 상태라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북한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는 북진 작전에서 이미 산악지대에 아군이 맹진격하고 있었으나, 금천에 포위된 북한군이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한 것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이미 증명된다. 게다가 북한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재수 없으면 기동부대가 역습받아서 괴멸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산악전의 쓰라림은 한국군이나 UN군이 엄청나게 겪은 일이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못 따라가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지리학적으로 한반도에는 [[추가령구조곡]]이란 특이한 지형이 있다. 추가령구조곡은 서울-의정부-동두천-연천-철원-평강-세포-고산-안변-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평탄하고 긴 골짜기이다. 고대부터 동해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이며 삼방협곡을 제외하고는 워낙 넓고 평탄하다 보니 분수령 혹은 분수계가 어디인지도 애매할 정도이며 백두대간이 추가령구조곡으로 인해 끊어졌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기술적으로 열악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경원선]] 철도를 놓을 수 있었을 정도이며 당시 많은 서울시민들이 경원선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피서를 가기도 하였다. 현재도 경원선 이외에 [[3번 국도]]가 지나가는데 이는 군사학적으로 중요한 기동로 및 보급로이며 군부대들이 겹겹이 밀집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육로를 통해서도 충분히 진출이 가능했으며 경원선 철도를 이용해 보급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상식적이지만 병력이동시 삼방협곡지역을 조심해야 하는데 경치는 아름답지만 자칫하면 죽음의 계곡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변 감제고지들을 철저히 장악해야 하며 [[철령]]고갯길도 기동은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병력을 배치하여야 한다. 위에서 춘천을 빨리 점령했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춘천을 통해서 원산으로 가는 것은 화천,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을 거쳐서 철령을 넘던지[* 신라시대 [[진흥왕]]때 [[죽령]]을 넘어 이 코스로 함경도까지 진출하긴 하였다.], 아니면 인제를 거쳐서 여러 고갯길을 넘어 동해로 빠진 다음 해안선을 따라서 북상하는데 대규모병력이 이동하기에는 훨씬 멀고, 험하고, 위험하다. 차라리 의정부에서 축석고개를 넘어 포천,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을 거쳐 철령을 넘는게 멀리 우회하긴 하지만 춘천을 거치는 것 보단 훨씬 낫다. 그러나 추가령구조곡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삼팔선]]을 돌파해야 한다. 북진작전이 빠르게 개시된 괸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의 UN군의 목적은 한국의 구원 및 삼팔선 이남 영토의 탈환'''이지 '''북한을 UN군이 침공하는 것이 아니다'''. 인천 상륙작전 실행시기까지 북한 침공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인천 상륙작전의 성과를 본 다음에 결정하려고 한 상황이었으며 원산 상륙작전도 인천 상륙작전이 대성공한 만일의 경우를 예상한 예비작전 수준에 불과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처음부터 삼팔선을 돌파해서 북한을 침공하는 추가령구조곡 이용안은 애초에 검토사항도 아니었다. 실제로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인해 예상보다 북한군이 빠르게 붕괴하면서 10월 1일에 한국군이 삼팔선을 넘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UN군은 삼팔선에서 진격을 정지해야 한다'''는 명령이 살아있는 상태였고 이걸 해결하려고 맥아더가 지금 이 상태로 방관하면 혼자 진격하는 한국군이 북한군에게 허리를 끊겨서 괴멸당할 것이라고 미국 정부에 소리를 지른 끝에 10월 9일에 와서야 미국 내에서 반쯤 승인이 날듯말듯한 상황에서 UN군이 현장판단으로 북진을 시작하자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추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지연전 및 방어전에서 경험한 산악전의 쓰라린 아픔과 삼팔선 이남 지역의 중부지방에 쓸만한 동서교통로가 없는 상황에서는 원산에 상륙작전을 펼치는 것을 충분히 고려할 만 했고 실행할 필요도 존재했다. 문제는 북한군의 붕괴가 너무 빨라서 한국군의 진격이 너무 빠른 것 때문에 실행중인 상륙작전을 취소하기가 곤란해졌다는게 큰 문제였고 북진작전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결국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격이 된 원산 상륙작전으로 인해 북진작전은 엉성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동안의 산악전에서의 쓰라림과 한국군의 허약함 및 맥아더의 개인적인 야망 덕분에 북한 내부의 좁은 지역에 방어선을 건설한 후 낙동강 방어선처럼 엄청난 물량을 동원해서 화력전을 하는 동시에 산악지대에서 피튀기는 전투를 하면서 전쟁을 길게 이어가고 전쟁비용도 빠르게 증가하여 미국 국가재정에 압박을 가하는 것보다는 빠른 전쟁승리 후 종결을 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평양 - 원산선이나 청천강 - 함흥선과 같은 북한 내부의 좁은 방어선을 철저하게 만들지 못하고 한반도 북쪽 국경지대까지 급속전진하다가 중공군에게 대타격을 입게 된다. 만약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대로 평양과 원산 라인 정도에서 강력한 수비라인을 구축하고 진군했다면 아무리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맞선다 하더라도 시야가 훤히 보이는 넓은 평지에서 미군의 강력한 화망 앞에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이고, 버텨 봤자 보급난과 UN군의 폭격으로 얼어죽거나 굶어죽게 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마오쩌둥 입장에선 한반도에 주력이 고립된 상황에서 잘못하다가는 [[빈집털이]](중국본토상륙작전)[* 물론 당시 대만은 [[국부천대]]를 한지 10년도 안된 상태에서 터진 [[2.28 사건]] 등 국내외적으로 시끌벅적 했고 미국도 확전이 될 경우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위압감 때문에 이를 반대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중국본토상륙을 빼더라도 중국입장에선 득될 것 없는 타국의 전쟁에서 자국군 배태랑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좋아할리도 없고, 더군다나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으로 세계대전보다 8년 일찍 전쟁을 시작해 국공내전으로 4년 늦게 전쟁을 끝낸 중국입장에선 전후처리 및 재건사업 해야할 시간에 전쟁으로 발목이 잡혀있으니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중국도 빠르게 포기하여 한국전쟁이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다.]를 당할수도 있으므로 매우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하며 따라서 역사가 크게 바뀔 수 있었다. 어찌보면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욕심때문에 김일성이 인천상륙작전을 허용했다면, 반대로 맥아더는 그 욕심으로 1.4후퇴를 하게 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